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드로 랑가라 (문단 편집) ==== 클럽 ==== 1930년, 18세의 나이로 당시 [[라리가 2|세군다 디비시온]] 소속이었던 [[레알 오비에도]]의 선수가 된 랑가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비에도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수가 되었다. 데뷔전이었던 [[아틀레티코 마드리드]]와의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오비에도의 4대1 승리를 이끈 랑가라에게 세군다 디비시온은 좁은 무대였다. 결국 랑가라는 1932-33 시즌에 오비에도를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우승시키며 오비에도와 함께 [[라리가|프리메라 디비시온]]에 데뷔했다. 랑가라의 득점포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도 쉬지 않고 가동되었고 그 결과는 3년 연속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이었다. 그것도 당시에는 18경기(1933-34 시즌), 22경기(1934-35, 1935-36 시즌)으로 지금보다 경기 수가 훨씬 적어서 득점 2위 그룹이 20골 언저리로 골을 넣을 때 랑가라는 혼자서 26골 이상씩을 넣는 압도적인 골 기록을 선보였다. 현재의 38경기로 치환하면 1933-34 시즌에는 54.9골, 1934-35 시즌에는 46.6골[* 이 시즌에 오비에도는 3위의 성적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오비에도 역사상 가장 높은 리그 순위 기록이다.], 1935-36 시즌에는 48.4골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나온다. 물론 경기를 지속하다보면 페이스가 떨어질 수 있음을 감안해도 랑가라의 당시 득점력은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다른 공격수들보다 한두차원은 위에 있음은 분명했다. 그는 오비에도에서의 6시즌 동안 220회의 경기에 출전하여 281골을 넣었다.[* 공식 경기로 한정하면 160경기 230골이라고 한다.] 하지만 이 거침없던 골폭풍은 [[스페인 내전|전쟁]]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. 랑가라는 당시 [[프랑코 정권]]에 위험인물이었고 전쟁을 피해 [[기예르모 고로스티사]], [[루이스 레게이로]], [[호세 이라라고리]], [[레오나르도 실라우렌]] 등과 유럽 투어를 다녔다. 그들은 경기를 치르며 바스크 난민들을 위한 모금과 바스크 정부의 정당성을 호소했다. 결국 [[빌바오]]가 [[팔랑헤]]의 손에 떨어지자 그들은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로 건너갔다. [[쿠바]], [[아르헨티나]] 등을 거쳐 그들은 [[멕시코]]에서 CD 우스카디(Uzkadi)라는 이름으로 한 시즌을 치른 후 팀은 해산했고 랑가라는 그의 전 팀동료였던 앙헬 수비에타(Ángel Zubieta)의 소개로 [[수페르리가 아르헨티나|아르헨티나]]의 [[CA 산 로렌소]]에서 뛰게 되었다. 랑가라는 [[CA 리버 플레이트]]와의 아르헨티나 무대 데뷔전에서 전반에만 4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데뷔를 했고 4시즌 동안 리그 득점왕 1회를 포함, 110골[* 121경기 출전]을 넣으며 역대 산 로렌소 클럽 통산 득점 랭킹 7위에 올랐다. 다만 아르헨티나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. 1942년 산 로렌소의 멕시코 투어에서 랑가라는 9경기에 나가 23골을 넣는 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. 1943년, 랑가라는 [[리가 MX|멕시코]]의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로 이적했다.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에는 이미 이라라고리가 뛰고 있었고 실라우렌도 랑가라와 비슷한 시기에 동료가 되었다. 랑가라는 멕시코에서도 2차례 득점왕에 올랐고 한 차례씩 리그와 컵 대회에서 우승했다. 1946년, 프랑코 정권에서 바스크 선수들을 포함한 정권에 반대했던 선수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. 드디어 랑가라는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친정팀 오비에도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. 복귀 시즌에 비록 30년대와 비슷한 골기록을 쌓지는 못했지만 18골을 넣으며 전체 리그 득점 4위에 자리했고, 다음 해에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축구화를 벗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